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숨숨집을 하나 쯤 장만해두고 있지 않을까. 고양이에게 아직 남아 있는 야생 본능 때문에 몸을 안전히 숨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고양이와 함께 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집에 생명체라곤 나뿐이니 특별히 숨숨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없었다.

과거형이 된 이유는 주기적으로 젤과 반려가전과 콘돔을 치워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걸 예상치 못하고 일을 벌인 내 잘못이다. 아니다, 자위기구가 집에 많은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허겁지겁 라탄 서랍 두 개에 젤과 우머나이저, 새티스파이어, 아쳐와 롬프 비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충전하는 케이블을 넣고 있으면 조금 못마땅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왜 내가 이렇게 궁시렁 대고 있는가? 며칠 전 청소 노동자 분이 다녀가셨기 때문이다.

Cleaning service sign

나는 자취한 지 제법 오래 된 편이다. 그동안 내 나름대로 집을 쓸고 닦아왔는데 뭘 어떻게 해도 깨끗해지는 것 같지 않았다. 청소하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도 실력이 늘기는커녕 스트레스만 쌓여, 급기야 집 청소를 해야 한다는 강박과 하기 싫고 할 때마다 괴로운 마음이 갈등을 일으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또 한국에서 장녀로 자란 세월이 집 청소를 남에게 맡기는 것은 용납 불가능한 짓이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해, 홀로 눈물을 흘리며 걸레질을 하기를 n년! 작년 말,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길고 긴 합리화의 시간을 거친 끝에 드디어 매 달 한 번 클리너 분을 모시기로 한 것이다.

대망의 청소 날! 클리너 분이 이 집은 처음이니 청소하기 쉽게 어질러져 있던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기로 했다. 접이식 식탁도 다시 거실에 내놓고, 락스와 수세미를 꺼내고, 책도 책장에 돌려놓고 하던 중, 화장실 선반에서 우머나이저 클래식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누워 있는 우머나이저 클래식을 보자마자 침대 헤드에 늘어져 있는 다른 반려가전들이 생각났다. 세상에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야? 당장 우머나이저 클래식을 들고 방으로 튀어가 라탄 서랍에 던지듯이 집어넣은 후, 침대 헤드에 놓여있던 모든 반려가전과 젤을 싸그리 집어 들어 역시 라탄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 와중에 다른 반려가전과 콘돔들로 서랍이 거의 다 차서 서랍 두 개를 사용해야 했다. 클리너 분이 오실 때까지 시간이 제법 넉넉하게 남아있었는데도 왠지 모르게 이것들을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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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페미니스트, 계약직 노동자, 팟캐스터 / 팟캐스트 '페어북 ; 페미니스트 퀴어 북클럽'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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